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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뮤지컬〈드라큘라〉 – 그 밤이 지나고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 어쩌면, 모든 건 그 밤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사람들이 내게 물었다.“그 후로는 괜찮으셨어요?”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괜찮다고, 이제는 다 지나갔다고.아이를 안고 조나단과 함께 걷는 이 평온한 일상이 나를 감싸고 있긴 하니까.그런데,그건 절반쯤만 진실이다.조용한 밤이면 그날이 떠오른다.피 냄새와 바람 소리, 그리고 그의 목소리.그가 내 이름을 부르던 순간,나는 지금까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잊을 뻔했다.그와 처음 마주쳤던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한다.그건 두려움이나 충격보다 훨씬 더 강한 감정이었다.뭔가 오래전부터 나를 지켜본 사람처럼,낯설지만 이상하게 따뜻한 눈빛이었다.그가 입을 열자마자 내 이름을 불렀다.“미나.”그 한마디가 모든 걸 바꿨다.이야기에서만 존재하던 존재가 현실이 되었고,그 현.. 더보기
뮤지컬 〈베르테르〉, 사랑이 내게 남긴 마지막 편지 뮤지컬 〈베르테르〉, 사랑이 내게 남긴 마지막 편지1.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그날, 나는 단지 시 한 편을 완성하고 싶어서, 혹은 자연 속에서 나 자신을 다시 찾고 싶어서 그 마을에 갔던 거였어. 그런데 그곳에 그녀가 있었지. 롯데. 이름 하나만으로도 온 세상이 조용해지는 듯한 여자. 그녀는 아이들과 웃고 있었고, 그 웃음은 내가 알던 세상의 어떤 음악보다 따뜻했어.나는 그 순간, 이미 빠져버린 거야. 어쩌면 사랑이라 부르기엔 너무 갑작스러웠고, 또 너무 순수했지. 그저 ‘좋다’는 감정으로 시작된 마음은 곧 ‘그녀 없이는 숨 쉴 수 없다’는 절실함으로 커져갔어. 그건 내가 원해서 선택한 감정이 아니었어. 마치 비가 내리면 땅이 젖듯, 그녀가 내게 미소 지었기에 나는 사랑에 빠졌던 거야.2. 그녀는.. 더보기
〈레베카〉 속 나의 시선, 댄버스 부인을 바라보며 1. 이름 없는 나, 그녀의 그림자 앞에서그의 손을 잡고 처음 맨덜리에 들어섰을 때, 나는 내 이름을 잃었다. 누구도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고, 나조차 나를 부르지 못했다. 벽지에서 나는 오래된 장미 향, 카펫을 밟을 때마다 울리는 먼지 섞인 숨결, 그리고 어딘가 날카롭고도 차가운 시선. 그 모든 것이 나를 조용히, 그러나 천천히 짓눌렀다.그 중심엔 그녀가 있었다. 댄버스 부인. 그 눈빛은 내가 아닌 누군가를 향하고 있었고, 그 목소리는 나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는 맨덜리의 주인이 아니었지만, 분명 주인보다 더 깊이 이 집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는 레베카를 숭배했고, 나는 그 숭배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나는 누구지?’ ‘왜 나는 여기에 있는 거지?’ 끊임없는 질문이 마음속에서 울렸고, 대답 없는 .. 더보기
〈명성황후〉, 무대 위에서 다시 숨 쉰 황후의 시간 무대 위, 황후의 숨결이 되다– 배우 신영숙, 2025년 세종문화회관 〈명성황후〉를 마치고1. 다시 시작된 이름, ‘명성황후’2025년 1월, 다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섰다. 30주년 기념 시즌의 첫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 작품은 내게 처음부터 특별했다. 1999년, 조연 ‘손탁’ 역으로 데뷔했던 무대, 그 무대 위에서 다시 ‘명성황후’로 서 있는 지금, 그것은 단순한 복귀가 아니라, 한 사람의 배우 인생을 돌이켜보는 순간이기도 했다.막이 오르기 전, 늘 그랬듯 무대 뒤 조용한 공간에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오늘도 당신을 살아내겠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단지 배역이 아니었다. 하나의 생명이었고, 하나의 시대로서 존재했다.2. 황후라는 옷을 입는다는 것의상실에서 명성황후의 옷을.. 더보기
뮤지컬 〈영웅〉, 내가 정성화였다면 뮤지컬 〈영웅〉, 내가 정성화였다면무대가 어두워지고, 조명이 천천히 발밑을 비출 때마다 나는 가끔 상상한다. 내가 정성화였다면, 그 무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역사 속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려 말을 전하는 자리. 대본을 처음 펼쳤을 때부터 무거운 책임감 같은 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는 그 시대를 몸에 품고 살았을 테니까.하지만 막상 무대에 발을 딛는 순간, 마음이 조금은 달라졌을 것 같다. 긴장된 공기 속에서도 따뜻한 무언가가 있었을 테고, 조명이 뜨겁게 등을 밀어줄 때마다 그는 안중근이라는 사람에게 조금 더 가까워졌을지도. 그 순간만큼은 연기자라기보단,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으로 서 있었겠지.1. 영웅이라는 이름을 입는다는 것‘안중근’이라는 세 글자. 그.. 더보기
〈The Story of My Life〉, 나비는 바다로 간다 나비의 노래를 따라, 다시 바다를 꿈꾸다한 장의 종이가 있다. 잉크 한 방울 묻히지 못한 채, 책상 위에 하얗게 놓여 있다. 손끝은 멈춰 있고, 마음은 너무 무겁다. 친구의 죽음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아니, 쓸 수가 없다. 모든 단어들이 그를 설명하기엔 너무 작고 가볍게 느껴진다. 머릿속엔 그와 함께했던 날들보다, 하지 못했던 말들이 더 크게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한 구절이 나를 깨운다. "바람 따라, 나비는 바다로 간단다."그건 기억일까, 상상일까, 혹은 환청일까.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였다. 엘빈. 내 유일한 친구. 내 유일한 나비.1. 내가 외면했던 친구, 그가 남긴 노래나는 늘 혼자라고 느꼈다. 어릴 적부터. 언제나 머릿.. 더보기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창조된 존재는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가 1. 위대한 생명창조의 순간 – 신이 되고 싶었던 인간처음 이 넘버를 들었을 때 나는 이건 단순한 과학자의 ‘열정’이라기보단, 세상의 모든 규칙을 무시하고 신이 되고 싶어하는 인간의 광기에 가깝다고 느꼈다.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죽은 생명을 살리는 실험을 한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본인도 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이걸 내가 해냈다는 사실” 자체다.“내가 세상의 질서를 거스르고,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면 그건 인간을 넘는, 창조자의 반열에 서는 거다.”실제로 이 장면에서 유준상 배우가 부른 ‘위대한 생명창조의 순간’은 광기와 집착, 확신과 오만이 동시에 뒤섞인 에너지 덩어리 같았다. 손짓 하나, 눈빛 하나에.. 더보기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Confrontation – 인간의 내면이 무대 위에서 맞붙는 순간 1. “역시 홍광호”… 그 말이 저절로 나왔다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는 말이 필요 없는 작품이다. ‘지금 이 순간’ 하나로 입덕한 사람도 많고, 이미 몇 번씩 관람한 관객들도 여전히 다음 시즌을 기다리는 작품이기도 하다.나는 사실 ‘지금 이 순간’보다 더 깊이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바로 ‘Confrontation’, 지킬과 하이드가 한 무대 위에서 직접 맞붙는 유일한 넘버다.2014 시즌, 홍광호 배우가 지킬과 하이드로 무대에 올랐을 때, 나는 그냥 “역시…”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단지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아니라 감정의 결을 ‘소리로 형상화’할 수 있는 배우라는 걸, 그날 공연을 통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