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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명성황후〉, 무대 위에서 다시 숨 쉰 황후의 시간

뮤지컬 명성황후 포스터이미지

무대 위, 황후의 숨결이 되다
– 배우 신영숙, 2025년 세종문화회관 〈명성황후〉를 마치고

1. 다시 시작된 이름, ‘명성황후’

2025년 1월, 다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섰다. 30주년 기념 시즌의 첫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 작품은 내게 처음부터 특별했다. 1999년, 조연 ‘손탁’ 역으로 데뷔했던 무대, 그 무대 위에서 다시 ‘명성황후’로 서 있는 지금, 그것은 단순한 복귀가 아니라, 한 사람의 배우 인생을 돌이켜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막이 오르기 전, 늘 그랬듯 무대 뒤 조용한 공간에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오늘도 당신을 살아내겠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단지 배역이 아니었다. 하나의 생명이었고, 하나의 시대로서 존재했다.

2. 황후라는 옷을 입는다는 것

의상실에서 명성황후의 옷을 입을 때, 나는 그것이 단순한 의상이 아님을 안다. 그 옷은 무게였다. 시대의 무게, 백성의 무게, 그리고 한 여인의 운명을 짊어진 무게.

〈황후의 노래〉를 부를 때면 나는 늘 복잡한 감정에 휘감긴다.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백성을 품으려 했던 여인의 눈빛, 사랑하는 남편조차 지켜줄 수 없었던 슬픔, 그리고 무너지는 조선을 바라보며 느꼈을 절망.

그 노래는 단순한 절규가 아니다. 그것은 절제된 품격 속에서 터져 나오는 마지막 의지였다. 그리고 나는 매번 그 감정을 무대 위에서 최대한 절제하며, 그러나 놓치지 않게 담으려 애쓴다.

3. 배우로서의 고백, 그날의 감정

연습실에서 대본 첫 장을 넘기던 날, 나는 울컥하며 책을 덮었다. 이 인물을 내가 다시 연기할 수 있을까. 아니, 이 무게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 순간엔 제가 아니었어요. 정말 황후가 제 안에서 호흡하고 있었죠.” 어느 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건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명성황후라는 인물은, 내가 부른 그 노래 안에서 진짜 숨을 쉬고 있었고, 무대 위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특히 〈그대 떠난 후〉 넘버를 부를 때, 나는 무대 위 조명 아래 홀로 선다. 그 순간, 조명이 따뜻하면 눈물이 나오고, 조금 차가우면 숨을 가다듬는다. 관객은 모르겠지만, 그 섬세한 감정 하나하나가 내겐 매번 새로 태어나는 장면이었다.

4. 고개를 들고 죽음을 맞이하다

명성황후의 최후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역사다. 궁궐 안에서의 참혹한 죽음, 하지만 내가 바라본 황후는 단지 비극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고개를 들고 있었다.

〈백성이여 일어나라〉를 부르며,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관객을 바라본다. 칼날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눈빛으로. 그 눈빛은 매회 조금씩 달라진다. 어떤 날은 분노가 더 크고, 어떤 날은 체념이 앞선다. 하지만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녀는 황후였고, 그 사실은 끝까지 지켜냈다는 것.

관객이 숨을 죽이는 그 순간, 나는 배우이기 이전에 한 시대를 대신 살아내는 사람이라는 걸 실감한다.

5. 커튼콜, 그리고 관객과의 대화

무대는 끝났지만, 이야기는 계속된다. 커튼콜을 받을 때마다 나는 배우로서가 아니라 그 인물을 보내는 마음으로 고개 숙인다.

어느 날, 한 관객이 손편지를 전해왔다. “황후님의 고개가 마지막까지 숙여지지 않아, 제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그 편지를 읽으며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 연기가 누군가에게 닿았다는 사실, 그 감정이 관객의 삶을 울렸다는 것. 그것은 모든 배우가 바라는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조심스레 숨을 쉬며 무대에 선다. 명성황후의 호흡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마음으로 노래하고 싶어서다.

6. 나, 그리고 황후

이 작품은 단지 내 커리어의 정점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배우로 살아가는 이유를 매번 새롭게 묻는 질문이다. “너는 너의 마지막 순간, 무엇을 지키겠는가?”

황후는 나라를 지키려 했고, 백성을 품으려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의 자존심을 놓지 않았다.

나는 신영숙으로 무대에 서지만, 그 순간만큼은 황후로 살아간다. 그녀의 말투, 그녀의 눈빛, 그녀의 마음으로.

그리고 그렇게 살아내고 나면, 무대 뒤에 돌아와 나는 늘 고개 숙여 감사한다. “오늘도 그녀를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