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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The Story of My Life〉, 나비는 바다로 간다

 

The Story of my life 뮤지컬 포스터 이미지

나비의 노래를 따라, 다시 바다를 꿈꾸다

한 장의 종이가 있다. 잉크 한 방울 묻히지 못한 채, 책상 위에 하얗게 놓여 있다. 손끝은 멈춰 있고, 마음은 너무 무겁다. 친구의 죽음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아니, 쓸 수가 없다. 모든 단어들이 그를 설명하기엔 너무 작고 가볍게 느껴진다. 머릿속엔 그와 함께했던 날들보다, 하지 못했던 말들이 더 크게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한 구절이 나를 깨운다. "바람 따라, 나비는 바다로 간단다."

그건 기억일까, 상상일까, 혹은 환청일까.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였다. 엘빈. 내 유일한 친구. 내 유일한 나비.

1. 내가 외면했던 친구, 그가 남긴 노래

나는 늘 혼자라고 느꼈다. 어릴 적부터. 언제나 머릿속엔 이야기가 맴돌았고, 나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세상은 시끄럽고 날카롭고, 종종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나에게 엘빈은, 처음으로 "괜찮아. 그대로 있어도 돼"라고 말해준 사람이었다. 나와는 다르게 어수룩해 보였고, 수많은 나비를 수집하며 엉뚱한 말들을 일삼았지만, 엘빈은 나의 삶에 처음으로 색을 입혀준 친구였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아니, 그는 애초부터 내 친구였고, 내가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된 건 조금 늦었을 뿐이다. 책과 침묵 속에 숨어 있던 내게 그는 매일같이 말을 걸었고, 어이없는 농담을 던졌고, 누구보다 진심으로 나를 들여다봤다. 나는 그게 귀찮았고, 무심했고, 그래서 결국 외면했다.

나는 그 아이가 남긴 나비들 중 하나였을까. 아니, 그 나비가 어쩌면 나였던 걸까.

그 애가 떠난 후, 나는 헌사를 써야 했다. 내 가장 오래된 친구, 내 유일한 기억의 파트너를 위한 마지막 인사. 하지만 아무 말도 쓸 수 없었다. 펜을 쥔 손이 너무 무거웠다. 종이는 하얗기만 했고, 내 마음은 죄책감과 무기력으로 가득했다. 나는 왜 엘빈을 외롭게 뒀을까. 왜 그 아이의 말에, 그의 나비들에, 그의 사랑에 진심으로 반응하지 못했을까.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엘빈이 불러주던 그 노래였다.

2. 나비처럼, 그는 끝내 바다로 날아갔다

“바람 따라, 나비는 바다로 간단다.”

나는 바다를 두려워했다. 아니, 실패를 두려워했고, 떠나는 것을, 잊히는 것을, 스스로를 잃는 걸 무서워했다. 그래서 늘 한자리에만 머물렀다. 그곳이 익숙하고, 조용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반면, 엘빈은 작지만 용감했다. 세상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이야기들을 소중히 간직했고, 그 조각들을 모아 나에게 전해주곤 했다. 그는 언제나 내게 말했었다.

"네 날개짓으로 이 세상이 바뀔 수 있어. 너는 그걸 몰라. 하지만 나는 알아."

나는 그걸 웃어넘겼었다. "뭘 또 그렇게 오글거리게 말을 하냐"고. 하지만 지금, 나는 안다. 내 안에 그가 남긴 작은 나비가 아직 살아 있음을. 그리고 그건 멈춰 있었던 내 삶을 움직이게 만드는 가장 작고 단단한 힘이라는 것도.

나는 가끔 상상한다. 엘빈이 그 노래를 부르며 나를 대신해 바다로 나아갔던 장면을. 어둡고 조용한 도서관에 앉아 있던 내가 그 모습을 눈치도 못 채고 있었을 그 순간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의 결벽과 두려움, 그리고 내가 끝끝내 꺼내지 못할 감정들까지.

그리고 그가 떠난 지금에서야, 나는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서서히 알게 된다.

3. 그 노래는 나를 다시 걷게 만든다

“The Butterfly”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엘빈이 나에게 남긴 유언이었고, 동시에 나 자신에게 주는 새로운 선언이었다. 나도 날 수 있다. 나도 떠날 수 있다. 두려움을 품은 채, 날갯짓을 시작할 수 있다. 무서운 마음을 안고서도, 나는 움직일 수 있다.

나는 이제 매일 바다를 생각한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푸른 수평선 위에, 엘빈이 보내준 나비가 춤추고 있을 것만 같다. 때로는 멈춰 선다. 쓰러진다. 하지만 다시 일어난다. 그 멜로디가, 그 목소리가, 내 마음을 잡아 일으켜 세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왜 그 노래가 그렇게 특별했느냐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그건 누구에게 설명되는 종류의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아주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나를 위해 진심으로 불러준 단 한 번의 말이었다. "괜찮아, 너도 날 수 있어."

4. 나도 나비였다

이 뮤지컬이 위대한 이유는 거창한 무대장치도, 화려한 조명도 아니다. 단 두 사람의 대화, 한 곡의 노래가 관객의 삶을 바꾼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가진 가장 큰 힘이다.

나는 이제야 말할 수 있다. 나도 나비라고. 작고 약하지만, 바다를 향해 날 수 있는 존재라고. 그리고 그 시작은, 내 가장 소중한 친구가 남겨준 그 노래 한 곡이었다.

지금도 그 노래는 내 안에서 작게 떨리고 있다. 언제든 다시 날 수 있도록, 내 날개 끝에 바람을 얹어주는 작은 기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