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Confrontation – 인간의 내면이 무대 위에서 맞붙는 순간
1. “역시 홍광호”… 그 말이 저절로 나왔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는 말이 필요 없는 작품이다. ‘지금 이 순간’ 하나로 입덕한 사람도 많고, 이미 몇 번씩 관람한 관객들도 여전히 다음 시즌을 기다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나는 사실 ‘지금 이 순간’보다 더 깊이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바로 ‘Confrontation’, 지킬과 하이드가 한 무대 위에서 직접 맞붙는 유일한 넘버다.
2014 시즌, 홍광호 배우가 지킬과 하이드로 무대에 올랐을 때, 나는 그냥 “역시…”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단지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아니라 감정의 결을 ‘소리로 형상화’할 수 있는 배우라는 걸, 그날 공연을 통해 처음 실감했다.
무대 위에서 오직 한 사람이 두 인격을 오가며 싸운다는 설정은 누가 보면 너무 극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그 장면이 펼쳐졌을 때, 나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장면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2. 무서웠지만, 오히려 나를 마주보게 된 장면
처음 이 넘버가 시작됐을 때, 나는 객석에 앉아 있으면서도 괜히 숨을 죽이게 됐다. 그 긴장감은 무대 위 인물이 아니라, 어쩌면 내 안에서 싸우고 있는 누군가를 들켜버린 듯한 기분 때문이었다.
지킬은 처음엔 두려워하고, 하이드는 여유롭게 조롱한다. 하지만 점점 흐름이 달라진다. 지킬이 스스로를 잃지 않으려 버티는 장면이 나오고, 하이드조차 당황하는 순간이 스쳐간다.
이 곡은 단순한 대결이 아니다. 그건 내면에서 목소리들이 충돌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였다.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 양심과 충동 사이,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나 진짜 왜 이러지?” “왜 이렇게 내가 나를 못 믿겠지?” “이게 진짜 내 마음이 맞을까?”
이 넘버는 그런 생각들에, 무대라는 형식을 입혀서 우리 앞에 보여준다. 그러니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감정은 묘하게 나를 위로했다.
3. 한 호흡 한 박자에도 감정이 담긴다는 걸 알게 해준 배우
사실 이 넘버는 보컬적으로도 굉장히 까다롭다. 대사처럼 흘러가야 하는 부분이 많고, 감정 변화가 너무 빠르다. 무대 위에서는 조명과 몸짓으로 어느 정도 캐릭터 전환이 가능하지만, 음성만으로 그걸 표현해내는 건 정말 어렵다.
그런데 홍광호 배우는 그걸 너무 당연하게 해낸다. 하이드일 때는 눈빛도 바뀌고, 목소리 끝에 실린 숨결이 거칠어지고, 반면 지킬일 때는 단호하면서도 흔들리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특히 기억나는 부분은 지킬이 하이드를 몰아세우며 외치는 마지막 절규. 그 때 그의 목소리는 그냥 고함이 아니라, 어디론가 가라앉아 가는 배의 선장이 마지막으로 외쳐보는 희망 같았다.
객석에서 듣고 있던 나도 그때는 마치 무대 위 싸움에 나까지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듣는 게 아니라, 같이 맞붙는 느낌이었다.
4. 나도 내 안의 하이드를 품고 있다
이 넘버가 끝난 뒤, 나는 숨을 내쉬는 걸 까먹고 있었다. 공연장이 그렇게 조용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모두가 멍하니 무대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킬이 이겨낸 것 같기도 하고, 하이드가 비웃고 떠난 것 같기도 한 그 장면은 마치 관객 각자에게 다른 감정을 남긴다.
나에게는 한 가지 질문이 남았다.
“나도 내 안의 하이드를 알고 있나?”
살다 보면 이상하게도, 내가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전혀 예상 못 한 모습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다. 말하지 말았어야 할 말,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 그게 과연 나일까?
이 넘버는 그 물음에 정답을 주진 않았지만, 적어도 나는 이제 내 안의 그림자도 내 일부라는 걸 조금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5. 공연이 끝난 뒤, 나를 돌아보는 시간
공연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 머릿속에선 계속 “넌 날 죽일 수 없어!” “나는 널 버린다!” 그 대사들이 맴돌았다.
그게 단순히 극 중 인물의 외침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꾹 눌러왔던 무언가를 건드린 느낌이었다.
뮤지컬이 끝났는데, 마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내와 아무 말 없이 차에 탔고, 창밖을 보다가 문득, 그날 회사에서 참았던 말 하나가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상처 줄까봐 삼켰던 말. 그게 지킬이었을까, 하이드였을까?
마무리하며
〈지킬 앤 하이드〉의 ‘Confrontation’ 넘버는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처음 보는 사람이든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지 못할 무언가를 남긴다.
그건 단순한 노래가 아니다.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가장 솔직한 싸움이고, 그 싸움을 무대 위에 그려낸 연기의 결정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홍광호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는 그날, 두 사람의 고통을 한 명의 몸으로 완성해냈다. 그리고 나는, 그 무대에서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마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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