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나에게도 그런 사흘이 있었다면
1. 평범한 이야기인데, 자꾸 생각난다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단순하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정말 뻔하다 싶은 이야기다. 아이오와 시골 마을, 농장 아내 프란체스카. 남편과 아이들이 잠시 집을 비운 틈에, 다리를 찾으러 온 낯선 사진작가 로버트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헤어진다.
딱 여기까지만 보면 전형적인 중년의 사랑 이야기 같기도 하고, 불륜을 미화하는 작품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뮤지컬은 그런 틀을 넘는다. ‘무엇을 선택하느냐’보다 ‘어떻게 남아 있느냐’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오히려 그들의 사흘이 더 길게 느껴진다.
2. 그 사흘, 나에게도 있었던 것처럼
공연을 보는 내내 프란체스카와 로버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예상하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계속 "이 둘이 함께하면 안 될까?"라고 속삭이게 된다. 사랑이 죄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가족을 버리는 건 또다시 죄 같다고 느껴지니까.
그 모순된 감정을 다 보여주는 게 이 뮤지컬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극적인 대사나 사건이 없이도, 관객들은 인물의 시선 하나, 말없이 바라보는 침묵 속에서도 얼마나 큰 선택의 무게가 실려 있는지를 느끼게 된다.
관객으로 앉아 있으면서도 나는 자꾸 프란체스카가 어떤 여자인지 상상하게 됐다. 늘 밭일과 집안일로 바쁘지만, 한때는 바다를 꿈꾸던 소녀였을 수도 있고, 누군가와 긴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젊은 아가씨였을 수도 있다. 그 마음을 떠올리는 순간, 이 작품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 이상이 된다.
3. 내가 직접 부른 그 노래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넘버 중 하나는 박은태 배우가 부른 ‘내게 남은 건 그대’다. 그리고 이 곡은 내 인생에서도 아주 특별한 장면과 연결되어 있다.
결혼식 날, 나는 이 노래를 부르며 신랑 입장을 했다. 보통은 축가로 불리는 곡을, 나는 직접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단정하게 턱시도를 입고, 마이크를 들고 걸어가면서 아내를 바라보던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날의 감정은 로맨틱함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그 사람과 함께하기로 결심한 모든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고, 나는 가사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아 부르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이 넘버가 공연 중 등장했을 때, 단순히 감상할 수만은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로버트였고, 그의 마음이 나의 마음처럼 느껴졌다.
4. 함께하지 못한 사랑이 더 오래 남는다
프란체스카는 결국 가족을 선택한다. 로버트는 떠난다. 하지만 관객은 안다. 그들이 서로를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를.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더 오래 남고, 더 순수하게 기억될 수 있었음을.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다. 이루어진 사랑,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함께 있는 사랑, 떠나야만 하는 사랑.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그 중에서도 ‘남겨진 사랑’이 얼마나 강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후 장면들에서 프란체스카는 로버트가 준 사진과 편지를 오래도록 간직하며 살아간다.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남편은 나이가 든다. 그 속에서도 그녀는 결코 그 기억을 잊지 않는다. 어쩌면 사랑은 그렇게 조용히 우리 인생에 머무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5. 뮤지컬을 보고 집에 돌아오는 길
공연장을 나설 때, 나는 말이 없었다. 아내와 함께 봤는데, 우리 둘 다 서로 눈치를 보며 말없이 걸었다.
이야기는 사흘 동안 벌어진 일인데, 마치 30년을 함께한 부부의 일기를 들여다본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향해 마음이 흔들렸던 적이 있었던가. 또는, 어떤 선택의 순간에서 나 자신을 눌러본 적은 없었는가. 그런 생각들이 줄줄이 따라왔다.
아내와 집으로 가는 차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잔잔한 음악 하나에도 괜히 감정이 흔들렸다. 뮤지컬이란 게 꼭 큰 울림이나 눈물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마음에 슬며시 들어와 눌러 앉을 수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마무리하며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화려한 작품은 아니다. 노래도 조용하고, 무대도 소박하고, 시간도 짧다. 하지만 이상하게, 아주 오래 남는다. 내가 이 공연을 본 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가끔 퇴근길에 문득 생각이 난다.
만약 나에게도 그런 사흘이 있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리고 지금 내가 지키고 있는 것들이 그때보다 더 중요한 게 맞을까.
그 질문이 자꾸 떠오른다. 그래서 이 작품이 오래 기억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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