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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복수가 아닌 사랑을 택한 아이 (웃는 남자 감상 후기)

그 아이를 처음 본 날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날이었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시끄러웠고,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공기처럼 흔했지만… 그 아이는 울지 않았습니다. 바닥에 쓰러진 채, 입술은 찢겨 있었고, 눈은 부었고, 몸은 얼어 있었지만, 그 애는 웃고 있었어요. 그 웃음이 어떤 뜻이었는지…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 미소가 정말로 살아남기 위한 본능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울 권리조차 빼앗긴 채 웃는 걸 배운 건지. 그때는, 아이를 안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 아이의 체온은 이상하게도 따뜻했어요. 겨울 속에서도, 한 번도 안아본 듯 낯설지만 꼭 잡고 싶은 온기였습니다.

웃는남자 포스터 이미지

나는 너를 데리고 떠났다. 너를 위해서라기보다, 나를 위해서.

사람들이 날 떠났고, 나는 혼자였죠. 작은 마차 하나, 몇 권의 책, 누더기 천 몇 장. 그게 나의 전부였는데, 그 안에 어느 날부터 한 아이가 생겼습니다. 이름도 없던 아이에게 나는 ‘그윈플렌’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웃는 얼굴을 하고 있던 아이에게… 어쩌면 나 혼자만의 희망이었겠죠.

우리는 길 위를 떠돌았습니다. 어린 그윈플렌은 연기를 배웠고, 소리를 익혔고, 무대에 섰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보고 웃었지만, 그 웃음 속에 담긴 진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가끔 공연 뒤에 조용히 앉아 혼자 있는 아이를 보면 그가 진짜 어른보다도 더 깊은 세계를 가진 존재라는 걸 느꼈어요. 세상은 그를 희극으로 소비했지만, 그는 늘 비극을 안고 살았으니까요.

그는 높이 올랐고, 나는 아래에서 지켜봤다.

시간이 흘러 그는 점점 커졌고, 사람들은 그가 ‘귀족의 피’를 가졌다고 말했어요. 나는 처음엔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윈플렌은 결국 궁정의 벽 안에 들어갔고, 빛나는 옷을 입고, 무대가 아닌 법정 위에 섰습니다.

그 순간 나는 기뻤습니다. 그리고 무서웠습니다.

그 아이가 세상에 닿을수록, 그 세상이 그를 다치게 할까 봐, 내가 다 못 막아줄까 봐, 그가 나를 잊게 될까 봐.

하지만 그윈플렌은 다르더군요. 그는 자신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부정하지 않았고, 그가 왜 그 자리까지 올라왔는지 스스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복수를 외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용서를 말했죠. 그에게 침을 뱉었던 자들 앞에서, 그는 저주보다 이해를 말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참 많이 울었습니다. 아이였던 그가, 세상 가장 어른다운 얼굴로 말하는 걸 들으며 내가 다 겪지 못한 인생을 그가 다 견뎌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의 마지막 모습은, 내 기억 가장 깊은 곳에 남았다.

그윈플렌은 끝내 한 사람을 선택했습니다. 복수도, 권력도 아닌… 자신의 존재를 진심으로 바라봐준 단 한 사람. 그를 괴물이라 부르지 않은 사람. 그 웃는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

그를 데려간 건 세상이었지만, 그가 향한 곳은 사랑이었습니다.

나는 그의 등을 바라봤습니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 말없이 떠나는 걸음을. 그 등엔 오랜 짐이 있었고, 그 발끝엔 마지막 결심이 담겨 있었어요.

그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걸 나는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슬프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는 끝까지 사람으로 남았고, 끝까지 울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르수스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윈플렌을 사랑했습니다.

<웃는 남자>는 ‘괴물’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건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한 아이의 생애에 대한 연대기이며, 그 곁에 있었던 나, 우르수스의 고백입니다.

박효신 배우의 목소리로 그윈플렌의 노래를 들었을 때 나는 처음 그 아이를 안았던 그날이 떠올랐습니다. 그 울림은 단순한 성량도, 기교도 아니었습니다. 그건 진심 그 자체였고, 한 생의 고통과 사랑을 껴안은 소리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기억할 겁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했던 말과, 그가 떠난 뒤의 침묵을 더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나는 우르수스입니다.
그 아이를 처음 안았고,
마지막까지 그의 길을 지켜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그윈플렌의 웃음을 기억하는 단 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