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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뮤지컬 〈영웅〉, 내가 정성화였다면

뮤지컬 영웅 포스터 이미지

뮤지컬 〈영웅〉, 내가 정성화였다면

무대가 어두워지고, 조명이 천천히 발밑을 비출 때마다 나는 가끔 상상한다. 내가 정성화였다면, 그 무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역사 속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려 말을 전하는 자리. 대본을 처음 펼쳤을 때부터 무거운 책임감 같은 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는 그 시대를 몸에 품고 살았을 테니까.

하지만 막상 무대에 발을 딛는 순간, 마음이 조금은 달라졌을 것 같다. 긴장된 공기 속에서도 따뜻한 무언가가 있었을 테고, 조명이 뜨겁게 등을 밀어줄 때마다 그는 안중근이라는 사람에게 조금 더 가까워졌을지도. 그 순간만큼은 연기자라기보단,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으로 서 있었겠지.

1. 영웅이라는 이름을 입는다는 것

‘안중근’이라는 세 글자. 그건 그냥 배역이 아니라, 시대가 남긴 질문처럼 느껴진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위인이 무대 위에서 숨을 쉬고 노래하게 될 때, 그 무게는 상상 이상일 것이다.

“누가 죄인인가.” 이 넘버를 처음 접했을 때, 정성화는 아마 감정보다 묵직한 책임을 느꼈을 거다. 단지 슬프고 강렬한 노래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외침이 담긴 노래.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에 박혔을 거고, 부를수록 그 안에 담긴 물음이 자꾸 가슴을 찔렀을지도 모른다.

무대 위에서 그걸 외치듯 부를 때, 그는 관객을 향해 진심으로 말을 걸고 있었을 거다. 그냥 잘 부르는 게 목적이 아니라, 함께 질문하게 만드는 순간. "진짜 죄인은 누구였을까?" 그 물음은 지금 우리에게도 이어지는 말 같았다.

관객의 눈빛 하나하나에서 그는 답을 찾았을지도. 무대는 감정으로 설명 안 되는 순간들이 많고, 어쩌면 그 진심이야말로 배우가 무대에 서는 이유 아닐까 싶다.

2. 무대가 끝난 뒤, 홀로 남겨진 시간

공연이 끝나고 조명이 꺼졌을 때, 무대 뒤에서 잠깐 멈춰 섰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조용히 앉아 있으면, 방금 전까지 가득했던 감정이 천천히 되돌아오니까. 그게 단순한 피로는 아니었을 거다. 마음 한켠에 남는 잔상이었을지도.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들었을 것 같다. "나는 정말 제대로 전달했을까?" 아무리 수십 번 공연을 해도 늘 남는 건 그런 물음이었다고 말할 것 같다. 관객이 남긴 짧은 말, "감사합니다" 그 한마디가 긴 시간의 연습과 고뇌를 덮어주는 느낌. 진심이 닿았다는 증거였으니까.

〈영웅〉이 가진 힘은 거기 있었던 것 같다. 관객의 박수보다, 고개 끄덕임보다, 그런 작고 단단한 반응들. 그게 무대를 기억하게 만들었을 거다.

3. 매번 새로웠던 무대

누군가는 같은 극을 반복하면 익숙하다고 말하지만, 아마 정성화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 거다. 〈영웅〉이라는 작품은 매 공연이 새로웠을 거다. 대사는 같았지만 감정은 늘 달랐고, 관객이 다르면 무대도 변했다.

그는 무대 위에서 조금씩 안중근을 닮아갔을지도 모른다. 연기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신념을 품는 사람으로. 그래서 그가 내뱉는 대사나 노래는 연기가 아닌 삶처럼 느껴졌고, 관객도 그걸 알았을 거다.

무대는 늘 처음처럼 시작했고, 마지막처럼 끝났다. 그래서 무대에서 내딛는 걸음 하나, 숨소리 하나까지도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런 무대가 관객의 마음에도 남았겠지. 마치 그날의 역사 속에 함께 있었던 것처럼.

4. 내가 정성화였다면, 그 무대를 기억할까

〈영웅〉은 관객에게 묻는 공연이기도 했지만, 아마 정성화 자신에게도 수없이 질문을 던졌을 거다. "나는 왜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까?" 매 대사마다, 매 넘버마다 그 물음은 떠나지 않았을 거다.

배우는 어쩌면 기억을 대신 나눠주는 사람이다. 그는 안중근이라는 이름을 빌려, 오늘을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고, 그게 무대의 역할이었을지도 모른다. 말투 하나, 걸음 하나, 눈빛 하나에 실린 진심이 관객에게 닿는 순간. 그건 누가 봐도 무대 이상이었다.

물론 이건 내가 상상한 정성화의 이야기다. 내가 그였다면, 무대를 어떻게 기억할까를 떠올려본 글일 뿐.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그 무대는 누군가에겐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는 울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아직 그 무대를 잊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