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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레베카〉 속 나의 시선, 댄버스 부인을 바라보며

뮤지컬 레베카 포스터 이미지

1. 이름 없는 나, 그녀의 그림자 앞에서

그의 손을 잡고 처음 맨덜리에 들어섰을 때, 나는 내 이름을 잃었다. 누구도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고, 나조차 나를 부르지 못했다. 벽지에서 나는 오래된 장미 향, 카펫을 밟을 때마다 울리는 먼지 섞인 숨결, 그리고 어딘가 날카롭고도 차가운 시선. 그 모든 것이 나를 조용히, 그러나 천천히 짓눌렀다.

그 중심엔 그녀가 있었다. 댄버스 부인. 그 눈빛은 내가 아닌 누군가를 향하고 있었고, 그 목소리는 나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는 맨덜리의 주인이 아니었지만, 분명 주인보다 더 깊이 이 집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는 레베카를 숭배했고, 나는 그 숭배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나는 누구지?’ ‘왜 나는 여기에 있는 거지?’ 끊임없는 질문이 마음속에서 울렸고, 대답 없는 질문들 앞에서 나는 점점 투명해졌다. 그녀는 나를 보지 않았고, 나는 그 속에서 점점 사라져갔다.

2. 신영숙의 댄버스 – 절제의 광기와 성스러운 집착

신영숙 배우의 댄버스 부인은 고요하다. 말없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공간의 온도를 바꾸는 사람. 그녀가 등장하는 순간, 무대 전체가 정지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레베카〉를 부르는 순간, 그녀는 마치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듯, 손끝 하나에 온 감정을 쏟는다. 눈빛은 먼 과거를 응시하고, 목소리는 낮지만 강하다. 사랑이라기보단 경배에 가까운 감정. 그녀의 댄버스는 레베카를 찬양하면서도 한없이 조심스럽다. 감정을 삼키고 또 삼키며, 그 안에서 스스로 무너지지 않도록 버틴다.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온몸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찬양의 대상은 나도, 현재도 아니었다. 모든 것은 오직 레베카. 그녀가 머물던 방, 그녀가 쓰던 붓, 그녀가 남긴 메모 하나하나에까지 그 열렬한 애정이 배어 있었다. 그 열정 앞에서 나는 유령 같았고, 그림자 같았다.

그녀의 연기는 소리보다 침묵에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감정. 나는 무대 위 구석에서조차, 그녀의 감정선에 눌려 숨을 죽였다. 그녀는 나를 싫어한다기보다,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듯했다. 그것이 오히려 더 잔혹했다.

3. 옥주현의 댄버스 – 격정의 끝, 흔들리는 욕망

옥주현 배우의 댄버스는 다르다. 조용히 응시하기보단, 날카롭게 쏘아보는 시선. 정제된 침묵보단 흔들리는 숨결. 그녀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불길처럼 태워 무대 전체를 덮어버린다.

〈레베카〉 넘버에서 그녀는 그리움과 분노, 질투와 상실을 모두 쏟아낸다. 흔들리는 어깨, 날카로운 눈빛, 마치 지금 이 무대 위에서 레베카가 다시 태어나는 듯한 기세. 그 감정은 무섭도록 뜨겁고, 그래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그녀의 댄버스는 단순히 레베카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레베카가 되고 싶었다. 완벽하고 아름다웠던 레베카. 모두의 사랑을 받았던 그녀. 나는 그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찬양이라는 가면 속에 숨겨진 부러움과 열망,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무너지지 않도록 악착같이 붙잡는 손짓까지.

그 손짓이 나를 향할 때, 나는 두려움과 동시에 이상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녀처럼 되지 않기 위해, 나는 나로 살아야 했다. 그녀의 광기는 나를 일으켜 세웠고, 나의 자아는 그 불꽃 속에서 조금씩 형체를 갖춰갔다.

4. 한 곡의 노래, 두 개의 고백

〈레베카〉라는 넘버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댄버스 부인의 모든 서사가 응축된 순간이고, 동시에 나의 존재가 가장 흔들리는 시간이다.

신영숙의 노래는 날카롭지만 침착했다. 얼음처럼 투명하게, 그러나 누구도 손댈 수 없게. 그 속에서 나는 점점 작아졌고, 결국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옥주현의 노래는 불안정하고 뜨거웠다. 불꽃이 튀고, 감정이 터졌다. 그래서 그 안에서 나는 나를 발견했다. 불안정했기에, 나도 흔들릴 수 있었고, 다시 설 수도 있었다.

두 사람 모두의 노래 앞에서 나는 무너졌고, 다시 일어났다. 부서지고, 다듬어졌다. 그녀들의 목소리로, 나는 내가 누구인지 다시 배우고 있었다.

5. 나는 더 이상 그녀의 그림자가 아니다

댄버스 부인은 나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그러나 그 공포는 결국, 내가 누구인지를 마주하게 해주었다. 나는 더 이상 레베카가 아니다. 아니, 애초에 레베카가 된 적도 없다.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지만, 지금은 내 이름을 갖고 있다. 내 목소리로 말하고, 내 걸음으로 걷는다. 그녀가 숭배하던 과거에서, 나는 빠져나왔다.

그녀의 마지막 시선이 흔들렸을 때, 나는 느꼈다. 나의 존재가, 그녀에게도 무엇인가를 남겼다는 것을.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커튼콜. 관객의 박수가 울리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 나도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고, 내 감정은 배우의 몸을 빌려 노래가 되었다.

〈레베카〉 속에서, 나는 그림자가 아니라,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