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나 심판을 꿈꾼다
나는 류크, 사신계에선 지겹도록 오래 산 존재다.
수천, 수만의 인간들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죽어가는 걸 보며, 이젠 죽음조차 지루하게 느껴지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냥, 심심풀이 삼아 데스노트를 하나 떨어뜨렸다.
정확히 말하면, 호기심이었다.
이 하찮은 인간 세계에 노트를 하나 던져보면, 과연 뭘 어쩌겠나 싶어서.
그리고 그는 나타났다. 야가미 라이토.
처음엔 그저 똑똑하고 잘생긴 고등학생쯤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의 눈은 달랐다.
그 안엔 세상에 대한 확신, 아니면 망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썩은 세상을 내가 바로잡겠다."
그가 처음 그 말을 꺼냈을 때, 나는 속으로 웃었다.
누구나 그렇게 말은 하지.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살지 못해.
그런데 이 녀석은… 곧장 사람을 죽였다. 아무 망설임도 없이. 이유는 단 하나, ‘악인이니까.’
그때 나는 알았다. 이 녀석은 진심이구나.
자신을 신이라 믿는 이 인간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심판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에게 데스노트는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고, 나는 슬슬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L, 또 다른 괴물의 등장
내가 데스노트를 떨어뜨린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지켜보는 재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야가미 라이토가 차곡차곡 세상을 바꿔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어딘가 허전한 느낌은 있었다.
그런데 그때,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등장했다. L.
처음엔 그저 괴짜 같았다. 구부정한 자세, 설탕 중독자, 사회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눈빛.
하지만 그는 달랐다.
L은 라이토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천재였다.
라이토가 논리를 설계하고 사람을 통제한다면, L은 직감과 감정을 밀어붙여 진실을 끌어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정의라고 믿었지만, 그 정의의 방향은 전혀 달랐고, 그 차이가 이 싸움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었다.
<The Game Begins>이라는 넘버가 울려 퍼질 때, 나는 확신했다.
이건 단순한 머리 싸움이 아니라, 정의라는 이름을 걸고 벌이는, 두 괴물의 지독한 장기판이었다.
라이토는 완벽하게 자신의 이론을 믿었고, L은 그 이론의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둘 사이에 피는 흐르지 않았지만, 매 장면마다 칼날이 날아다녔다.
나는 그 둘을 지켜보며 몇백 년 만에 진심으로 재미를 느꼈다.
그리고, 아주 조금 기대했다. 이 게임의 끝이 과연 어디로 향할지.
정의라는 이름으로, 결국은 욕망이었다
라이토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는 냉정했고, 치밀했고, 무엇보다 단 한 번도 자기 확신을 놓지 않았다.
사신이 보기에도 그런 인간은 드물다.
그는 처음엔 정말 정의를 믿는 것 같았다.
세상을 더 낫게 만들겠다는 목적도, 심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도, 놀라울 만큼 치밀하고 일관됐으니까.
하지만 조금씩, 그 확신은 달라졌다.
그는 점점 자신의 판단에 의문을 가지는 이들을 ‘악’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L을 죽이려 했고, 미사를 도구처럼 이용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가족마저 계산 속에 넣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가 진짜로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의심하게 됐다.
<Where is the Justice?>는 그가 외치는 정의의 모양이 점점 뒤틀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노래였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말했지만, 그 안엔 두려움과 집착, 그리고 ‘신’이라는 역할을 절대 놓고 싶지 않은 처절한 욕망이 함께 있었다.
나는 그를 끝까지 지켜보면서 조금씩 연민 같은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그는 결국, 자신이 만든 이상 속에 고립된 채, 누구보다 외로운 괴물이 되어갔다.
끝이 있다는 것, 인간만이 가진 조건
L은 죽었다. 라이토의 계략에 그대로 걸려들었다.
그렇게 조용하고, 그렇게 허망하게.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 게임의 재미는 절정에 이르렀고, 이제 남은 건 추락뿐이라는 걸.
라이토는 점점 조심스러워졌고, 더 완벽하게 보이기 위해 더 많은 거짓을 쌓았다.
하지만 그만큼 더 많은 허점이 생겼고, 그는 그 허점들을 메우기 위해 계속 누군가를 죽여야 했다.
더는 정의가 아니었다. 그저 생존이었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허세였다.
<Mortals and Fools>이 흐를 때, 나는 이 모든 것이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욕망의 끝이라는 걸 느꼈다.
라이토는 끝까지 자신을 신이라 말했지만, 그의 마지막은 그 어떤 인간보다도 비참했고, 그 어떤 죽음보다도 조용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살려달라고 했을 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아무 표정도 없이 그의 이름을 데스노트에 적었다.
그가 쓰러질 때, 나는 그제야 아주 짧게 웃었다.
라이토는 끝까지 정의를 믿었고, 나는 그걸 지켜보며 심심함을 덜 수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는 괴물 같았고, 동시에 너무나 인간이었다.
결국 정의라는 이름 아래 숨은 건, 지독한 욕망이었다는 것도 말이지.
다음 데스노트를 떨어뜨릴 땐, 또 누가 이런 흥미로운 쇼를 보여줄까.
인간이란… 진짜, 재미있는 생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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