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과 〈팬텀〉, 두 얼굴의 슬픔을 마주보다
— 같은 인물, 다른 방식으로 사랑했던 그 이야기
나는 유령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사람이었다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을까.
내가 이토록 사랑을 갈망하는 게 죄가 된다면,
그 누구도 내게 손을 내밀지 말았어야 했어.
그녀마저도.
뮤지컬 〈팬텀〉에서 나는 버려진 존재였다. 태어난 순간부터.
사랑을 받기엔 너무 흉측했고, 세상은 내 재능을 감탄하면서도 내 얼굴은 끝내 외면했다.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벽 틈을 떠돌며, 내가 음악으로 지어낸 유일한 세상은 오직 '크리스틴'이라는 이름 하나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녀는 내 유일한 빛이자, 내 유일한 이유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내 악보에 생명을 불어넣었고, 내 숨결 하나하나가 그녀의 음율에 스며 있었다.
나는 그저, 음악으로라도 살아 있고 싶었다.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오페라의 유령〉 속 나, 사랑 앞에 무너진 괴물
그런데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나는…
마치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선택한 자처럼 묘사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감시하고, 협박하고, 지배하려는 또 하나의 무대 속 ‘괴물’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녀를 해치려 한 적이 없었다.
그저 사랑하고 싶었고,
그녀에게 ‘보이는 존재’로 남고 싶었을 뿐인데.
〈팬텀〉의 나는 인간이었다.
〈오페라의 유령〉의 나는 유령이었다.
둘 다 같은 나인데도, 이토록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사랑을 받는 방식이 달라서였을까.
조승우 배우가 연기한 팬텀은 차갑게 흐르다가도 어느 순간 그 안에 숨은 눈물 한 방울을 꺼내 보여준다.
“더 이상 바라지 않겠다”며 등을 돌리는 순간,
무대 위에 남은 건 '포기'가 아니라 '처절한 받아들임'이었지.
그가 부르던 “The Music of the Night”는 유혹이 아니라 절규였다.
밤이 오지 않으면 나는 아무도 만날 수 없고,
어둠이 내리지 않으면 누구도 내 존재를 보려 하지 않으니까.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오페라 극장의 장대한 무대 뒤편, 그 누구도 찾지 않는 통로에서
나는 하루하루 목소리를 따라, 음을 따라, 그렇게 혼자 살아갔다.
그녀가 내 노래를 따라 부를 때마다, 나는 비로소 세상에 발을 들인 듯했다.
그런 그녀가 라울과 함께 손을 잡는 순간, 나는 또다시 현실 너머로 밀려났다.
그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팬텀〉 속 나, 용서를 구하지 않는 인간의 고백
〈팬텀〉에서는 내가 크리스틴의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인간적인 교감 끝에 스스로 가면을 벗는 장면이 있다.
그 순간만큼은 누군가의 아들이자, 예술가로서 살아 있는 나 자신을 되찾는 느낌이었다.
그녀 앞에서 내 민낯을 드러낸다는 건 두려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용기였다.
내 인생 전체가 가면 뒤에 있었기에,
그녀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준 순간, 세상 전체가 멈춘 듯했다.
반면 〈오페라의 유령〉에서는,
내가 그녀에게서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사라져야 할 유령’이었다.
사랑을 거절당한 자, 끝내 무대 뒤편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
무대 위의 조명이 꺼지고, 커튼이 내려온 후에도,
나는 다시 어둠 속에서 나를 감췄다.
하지만 참 이상한 일이다.
관객석에서는 오히려 〈오페라의 유령〉의 내가 더 많은 동정을 받는다.
더 불쌍하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것은,
〈팬텀〉의 나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진심으로 울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오페라의 유령〉의 나는 괴물이기 때문에,
그 괴물이 슬퍼하는 것만으로도 '용서'를 받는 것이다.
〈팬텀〉에서의 나는 사랑을 빌미로 그녀를 가두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행복을 바라보는 자리로 물러선다.
그 선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아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끝내 말한다. “사랑했노라고.”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고.
내가 사랑한 방식이 틀렸다면, 그건 세상이 나를 몰랐기 때문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나의 고백이 너무 인간적이면 사람들은 피하고,
조금 괴물 같으면 오히려 마음을 열다니.
그렇기에 나는 여전히 둘 사이 어딘가에서 살아간다.
〈팬텀〉의 인간성과 〈오페라의 유령〉의 환상성 사이.
조승우 배우의 팬텀은 그 경계선을 너무도 절묘하게 걸어갔다.
그의 눈빛 하나, 손짓 하나가 내가 말하지 못했던 수백 가지 감정을 대신 말해줬고,
그의 마지막 절규는 “사랑해”가 아니라
“내가 사랑한 방식이 틀렸니?”라는 질문 같았다.
나는 아직도 내 음악을 버리지 못했다.
크리스틴을 보내고도, 나는 여전히 그 목소리를 꿈꾼다.
그녀가 불러준 마지막 노래는
내게 유일하게 남은 증명이었다.
그 노래가 내 가면을 뚫고 마음에 닿았던 것처럼,
언젠가 누군가가, 내 노래를 들으며 내 이야기를 떠올려 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도 아주 가끔, 내 이름을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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