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사랑을 믿고 있었는지도 몰라
햇살이 유난히 따사롭던 그날,
내 딸 소피는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그저 웃으며 “그래, 네가 행복하다면…”이라고 말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어딘가 서늘했다.
그 애는 아직 어린 아이 같기만 했고,
나는 여전히 엄마로서 부족한 것만 같았다.
소피가 친구들과 장난스럽게 부르던 노래들 사이로,
언젠가의 나도 떠올랐다.
광란의 밤을 즐기던 젊은 시절,
그 속에서 세 명의 남자를 만났고,
그들 중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소피가 생겼다.
나는 사랑을 했고, 떠나보냈고, 잊은 척 살아왔다.
그 사랑들이 다시 내 앞에,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세 명의 남자, 그리고 오직 하나의 진심
샘, 해리, 빌.
세 남자가 내 섬에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한 그 순간,
나는 흔들렸고, 무너졌고, 동시에 어른스러워야 했다.
샘을 다시 마주한 순간,
나는 내 안에 여전히 남아있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와 함께했던 여름날,
해가 지고 바람이 불면 우린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았고
나는 그 따뜻함을 믿었다.
하지만 그는 떠났고,
나는 그를 원망하며
내 안에 있는 모든 따뜻함을 잠시 접어두고 살았다.
해리는 달랐다.
그는 언제나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소피를 안아보지도 못한 채,
그녀를 위해 뭔가 해주고 싶어하는 그의 눈빛은
서툴지만 진심이었다.
그의 편지를 몰래 읽던 순간,
나는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
소피와 나를 그리워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빌.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우린 함께 배를 탔고, 바람을 마셨고,
지중해의 섬들을 떠돌며 웃음을 나눴다.
어쩌면 그는 내게 책임보다는 순간의 행복을 알려준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세 남자, 세 가지 사랑.
그리고 나는 어느 하나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채
딸 하나를 키워냈다.
타냐, 로지… 함께 늙어가는 친구들
삶이 힘들어도,
늘 내 곁을 지켜준 친구들이 있었다.
타냐.
그녀는 언제나 도도하고 화려했다.
하지만 그 화려함 뒤에 숨은 진심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삶의 굴곡을 너도 나도 겪으며
우리는 서로를 놀리고 위로하며 살아왔다.
로지.
그녀는 늘 우스꽝스러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아줄 때,
나는 이 모든 시간들이 결코 혼자였던 적 없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댄싱퀸’을 불렀다.
젊은 날처럼 무대 위를 뛰어다니며
누구보다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
나는 딸에게 내 청춘을 자랑스러워하며 보여줄 수 있었고
동시에 다시 나답게 웃을 수 있었다.
그 장면은,
신영숙 배우가 ‘여자로서의 도나’와 ‘친구들과 함께 살아온 도나’를
완벽하게 오가며 만들어낸 명장면이었다.
관객석까지 전염된 그 흥겨움은
춤을 추지 않으면 손해처럼 느껴졌을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이 섬에서 나를 부른다
소피가 말했다.
“결혼식은 하지 않을래.
스카이와 함께 여행을 떠날 거야.”
나는 놀랐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모양은 다르지만,
진심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
그렇게 나는 딸을 떠나보냈고,
남겨진 나는…
그에게 말했다.
“샘, 나와 결혼해줘.”
모든 망설임과 상처,
그 날의 슬픔과 기쁨을 지나
나는 비로소 나 자신에게 말할 수 있었다.
“괜찮아, 도나.
이제 너도 사랑을 받아도 돼.”
샘이 나를 바라보던 눈빛,
그건 시간이 멈춘 듯 따뜻했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고
내 마음 속 오래된 겨울도
천천히 봄을 맞았다.
신영숙이라는 배우가 도나를 연기한다는 건
단순히 대사를 외우고 노래를 부르는 걸 넘어서
그 인물의 모든 삶을 입고 무대에 오른다는 의미였다.
그녀의 노래 한 줄, 눈빛 하나는
관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정을 안겨주었고,
나 역시 그 안에서 울고 웃었다.
커튼콜에서
모든 배우들이 손을 잡고 무대 위에 섰을 때
관객석은 일어나 함께 춤을 췄고
나는 그 날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되었다.
〈맘마미아!〉는 유쾌한 음악과 웃음을 품고 있지만,
그 안엔 사랑, 후회, 용서, 성장이라는
모든 삶의 이야기들이 녹아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도나가 있었다.
나였다.
지금도 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나면
나는 도나로서의 기억을 되짚는다.
거울 앞에 선 채,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그 날의 노래를 다시 흥얼거리곤 한다.
샘과 함께 걷는 이 섬의 골목골목마다
딸아이의 웃음소리가 아른거리고,
밤이 깊어질수록 나는 내 안에 남아 있는
소녀 시절의 나와 대화를 나눈다.
‘괜찮아, 너는 잘 살아냈어.’
그 한마디가 지금의 나를 지탱해준다.
도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사랑하고, 실수하고,
다시 사랑하는 여인이었을 뿐.
그리고 나는,
그 도나를 무대 위에서 살 수 있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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