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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뮤지컬 〈비틀쥬스〉라는 이름의 쇼타임

뮤지컬 비틀쥬스 이미지

유령이 이토록 웃기다고?

공연이 시작되기 전, 머릿속엔 이런 이미지가 있었다. 팀 버튼 특유의 기괴한 색감, 무채색의 유령들, 어두컴컴한 분위기. 그게 〈비틀쥬스〉라는 작품에 대한 내 사전 인상이었다. 물론 블랙코미디라는 장르는 알고 있었지만, 뮤지컬 무대 위에서 그것이 어떻게 구현될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그 모든 상상은 무너졌다.
이건 유령 이야기라기보단, 장르 자체가 '비틀쥬스'인 공연이었다.
죽은 사람도 살아 있는 사람도, 모두가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고, 때로는 관객에게 말을 걸고, 장르의 벽을 마음껏 넘나들었다. 무대는 지옥이기도 하고 거실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 둘이 동시에 존재했다. 나는 이게 지금 뮤지컬인지, 코미디쇼인지, 체험형 공연인지 구분이 안 됐고, 그게 너무 재밌었다.

비틀쥬스라는 캐릭터는 등장하는 순간부터 관객의 시선을 독점했다. 무대 위를 휘젓고 다니는 에너지, 의도적인 과장, 대사의 리듬, 심지어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그 돌발감까지. 말장난과 블랙유머로 가득한 대사들은 시도 때도 없이 터졌고, 객석은 웃음으로 들썩였다. 그런데 그 웃음이 억지스럽지 않았다. 어이없는 유머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흡입력이 있었다.

이 무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연출일까

〈비틀쥬스〉에서 내가 가장 놀란 건 무대 전환이었다.
무대는 단순히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있는 캐릭터처럼 느껴졌다.
회전무대는 기본이고, 천장이 무너지거나 벽이 열리고, 계단이 움직이는 장면까지 등장했다. 그것도 자연스럽게, 마치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무엇보다 영상과 조명의 활용이 기가 막혔다.
죽은 사람들이 등장할 때의 보랏빛 조명, 비틀쥬스가 마법을 부릴 때 갑자기 푸른 섬광이 터지는 순간들, 그리고 리디아가 엄마를 떠올리는 장면에서의 몽환적인 영상 처리. 이 모든 것이 이야기의 흐름에 감정을 실어주는 장치로 작동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하나 있다.
배우가 무대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동작을 하면서, 무대 전체가 순식간에 지옥의 공간으로 전환되는 장면. 관객인 나조차도 ‘지금 저 배우가 진짜 떨어진 거야?’ 싶을 만큼 현실감이 있었다. 이건 단순한 무대 효과가 아니라, 연출이 가진 창의성의 집합체였다.

사실 이 공연은 ‘얼마나 감동적이었냐’보다 ‘얼마나 상상력 넘쳤냐’가 더 중요한 지점이었다. 죽음을 주제로 다루고 있지만, 그걸 이렇게 재기발랄하게 풀어내는 연출은 처음 봤다.

장난기 뒤에 숨어 있는 이야기

비틀쥬스가 워낙 강렬한 캐릭터다 보니, 공연의 대부분은 그의 ‘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의외로 공연의 중심 감정은 리디아라는 소녀에게 있었다. 엄마를 잃고도 그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 남은 가족과는 소통이 되지 않고, 세상과도 벽을 쌓은 채 혼자 있는 아이.

리디아가 부르는 "Dead Mom"이라는 넘버는 웃음이 끊이지 않던 극 중 흐름을 한순간 멈추게 했다.
장난스러운 무대 위에서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진심,
그리고 그 진심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순간, 비틀쥬스라는 공연이 단순한 코미디를 넘어서게 된다.

비틀쥬스와 리디아의 관계도 흥미로웠다.
처음엔 말장난을 주고받는 이상한 친구처럼 보였지만, 공연이 진행될수록 이 둘 사이에는 기묘한 유대가 생긴다. 살아있는 리디아와 죽은 비틀쥬스, 서로가 서로를 통해 조금씩 달라져간다는 설정이 꽤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결국,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 공연은 삶을 더 찬란하게 만들기 위한 방식으로 웃음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게 내가 이 공연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다.

웃기기만 했다면 이렇게까지 남지 않았을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무의식적으로 박수를 치면서 웃고 있었다.
배우들이 하나둘씩 무대 위로 올라와 넘버를 부를 때, 내가 느낀 건 단순한 여운이 아니라 ‘기발함’에 대한 감탄이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이 공연은 단순히 웃긴 게 아니라, 놀라웠던 거구나.

죽음을 웃음으로 바꾸고, 유령을 친구로 만들어버리는 세계.
그 세계 안에 나도 잠시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공연 중간중간 관객에게 말을 거는 비틀쥬스의 유쾌한 멘트들은
단순한 장치가 아니라 관객을 공연 안으로 초대하는 통로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어느 순간부터 관객이 아니라 그 집에 함께 사는 세입자처럼 느껴졌다.

이런 공연은 많지 않다.
기괴함과 코미디, 감동과 진심, 현실과 환상이 어우러진 이 괴물 같은 무대는
결국 나에게 하나의 확신을 심어줬다.

‘비틀쥬스’는 이름만 불러도 다시 보고 싶은 공연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