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
그 사람은 웃기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대니는 처음부터 웃기는 사람이었다. 그의 웃음, 그의 재치는 처음엔 나도 참 좋아했다. 연애하던 시절엔 그런 사람이 참 멋져 보였으니까. 뭐든 유쾌하게 넘기고, 어디서든 중심이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고, 삶이 점점 현실로 내려앉기 시작하자 그 웃음은 점점 내게 스트레스로 변해갔다.
나는 회사 일도 해야 했고, 아이들 챙기기도 해야 했고, 매일매일 돌아오는 반복된 하루를 무겁게 버티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여전히 자유로웠다. 아빠이기보다는 형 같았고, 남편이기보다는 그냥 동네 친구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게 제일 외로웠다. 내가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것 같았고, 내가 혼자 이 집을 떠맡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랑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책임 없는 사랑은 결국 누군가를 다치게 한다는 걸, 나는 그 사람보다 먼저 알게 됐다.
그래서 끝냈다. 지친 것도 있었고, 어느 날 아침, 거울 속 내 얼굴이 너무 낯설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게 끝이었다.
미세스 다웃파이어, 그 사람의 변장
그런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우리 집에 나타났다. 가정부의 모습으로. 목소리도 다르고, 행동도 이상하고, 처음엔 웃기기만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익숙했다.
아이들은 좋아했다. 밥도 잘 챙겨주고, 숙제도 봐주고, 심지어 내가 미처 챙기지 못했던 감정까지 살펴주는 모습이 예전 그 사람보다 훨씬 낫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게… 솔직히 기분 나빴다. 마치 내가 부족한 엄마였던 것처럼 느껴졌고, 내가 그토록 애쓰고 지켜온 시간이 한순간에 가짜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은 점점 다웃파이어에게 마음을 열었고,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말투와 표정을 따라하게 됐다. 그 속에 숨어 있는 그 사람이 보였고, 애써 외면하면서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나를 속이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진심이 있다는 걸. 그게 더 혼란스러웠다.
엄마로, 여자로, 그냥 나로서의 고백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아이들을 위해서 참으셨어요?”, “대니가 철이 없었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아이들을 위한 엄마’로만 살고 싶지 않았다. 나도 사람이었고, 감정이 있었고, 누구에게 기대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 사람은 내가 버티는 줄 몰랐다. 그냥 당연히 내가 잘할 거라고 생각했지. 심지어 내가 힘들다는 말도, 투정처럼 흘려들었다. 결국 그런 무게가 나를 무너뜨렸다. 나는 늘 단단한 사람이길 요구받았지만, 사실은 계속 부서지고 있었던 거다.
다웃파이어가 나를 위로할 때, 나는 처음으로 그 사람에게서 ‘이해받는 기분’을 느꼈다. 그가 나를 다시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걸 느꼈고, 그게 진심이라면… 어쩌면 다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게 사랑의 회복은 아니었다. 다시 연인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서 다시 처음부터 얘기해보고 싶어진 거다.
나는 그 사람을 용서했을까?
그가 정체를 드러냈을 때, 놀랍지는 않았다. 어쩌면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스스로 그 가면을 벗기를.
아이들은 울었고, 나는 멍했다. 그 순간에도 감정을 조절해야 했으니까. 누군가는 또 ‘엄마’로서 판단을 해야 했으니까.
근데 그가 울먹이며 말하던 그 장면, 그 장면 하나로 나는 무너졌다. “나는 그냥 우리 아이들 곁에 있고 싶었다.” 그 말. 진짜로 마음에서 나온 말이라는 걸 느꼈다.
사람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그도, 나도. 하지만 그 사람은 변장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스스로 마주하게 됐고, 나는 그를 통해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다시 깨달았다.
그걸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조금은 안심이 됐다. 그 사람도 나와 똑같이 서툴렀다는 걸, 누구나 사랑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었다는 걸.
신영숙 배우는 그 감정을 정말 섬세하게 끌어냈다. 분노와 허탈함, 애써 쌓은 방어벽이 무너지는 순간까지 단 한 장면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눈빛은 흔들렸고, 그 모든 게 미란다였다.
그래도 나는, 이제 괜찮다
그 사람이 다시 우리 가족이 될 수 있을까? 솔직히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이제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
나는 여전히 이 집의 엄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나는 내가 살아야 할 삶을 선택했고, 이제는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이들도 웃는다. 그 사람도 달라졌다. 그리고 나는 이제, 나 자신에게 덜 미안하다.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나에게 ‘가족’이라는 말이 꼭 부부라는 틀 안에 있지 않아도 된다는 걸 보여줬다. 우리는 실패한 부부였지만, 서로의 실패를 알아봐준 사람들로 남을 수 있다는 걸.
그게 나한텐 충분하다.